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케시타 노보루 (문단 편집) == 생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2LUd5dyITe4)]}}}||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cache6.amanaimages.com/22973000901.jpg|width=100%]]}}}|| || 1987년 [[나카소네 야스히로]](右)와 [[라멘]] 한그릇. || [[시마네현]]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다케시타 유조는 [[시마네현]] 현의회 의원이었다. [[1944년]] [[와세다대학]] 상학부에 입학해 [[일본 제국 육군|육군]] [[조종사]]로 전쟁에 참전한다. 이후 [[아내]]가 [[자살]]했는데 '''다케시타가 아내를 [[구박]]해 그것에 못이긴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라는 루머가 평생 그를 괴롭혔다. 후일 [[재혼]]하였다. 한동안 고향인 시마네 현에서 중학교 [[영어교사]]로 일하며 청년운동에 투신했는데 이때부터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다. 훗날 미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중학교 선생이 총리가 되었다'''고 흠좀무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자유민주당(일본)|자민당]]에 입당한 뒤 [[사토 에이사쿠]]의 측근으로 활동하다가 훗날 [[다나카 가쿠에이]] 계파에 입성한다. 사토 에이사쿠 내각이 [[1964년]] 출범한 뒤 관방장관이었던 하시모토 토미사부로의 추천을 받아 관방 부장관이 되었으며 훗날 제3차 사토 에이사쿠 내각과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 [[관방장관]]을 역임한다. 자민당 중역들과 두루 친분을 유지하여 정치가로서 상당한 소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지마 류조]]와도 관계가 있었다. 실제로 오랫동안 그의 비서를 역임한 아오키 이헤이[* [[리크루트 사건]]과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 역시 '''두루두루 사람들과 잘 사귀며 적을 만들지 않는 원만한 성격'''이라고 평한 바 있다. 실제로 극우 정치단체인 황민당에서 '''다음 총리에는 돈 잘받는 다케시타를!''' 이라고 공공연히 노보루를 비꼬듯 폄하하고 다녀서 총리 인선에서 낙마할 뻔하기도 했다.[* 다케시타는 보스인 다나카 가쿠에이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황민당은 여기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때 다케시타가 황민당에게 입막음조로 수십억엔을 뿌렸다는 설이 파다했지만 진상규명은 흐지부지되었다.] 이때 자민당 중역들에게 상당한 정치자금을 뿌렸으며, 훗날 [[리크루트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묘한 공통점이지만 다나카 가쿠에이 역시 관료들의 입성 연도까지 기억할 만큼 비상한 기억력으로 인간관계를 확장했지만 문어발식 인간관계로 인해 결국 돈문제로 정치생명이 날아가게 된다. 다케시타나 다나카나 자수성가형 정치인들의 공통적인 굴레인 듯하다. 또한 [[미키 다케오]] 내각에서 76년 건설대신, [[오히라 마사요시]] 내각에서 79~80년에는 대장대신을 역임했다. 이후 다나카 계파에 속하면서 중의원의 주요 요직을 거치지만 다나카는 파벌에서 자신의 영향력이 약해질 것을 우려해 자신의 파벌에서 총리를 배출하지 않고 자꾸 외부 인사를 영입해 올린다. 그러자 다나카파 내에서 점점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고, 그 중심에 다케시타가 있었다. 결국 다케시타는 [[1985년]] 세칭 "창조정치회" 를 세워 독립하고, 이로 인해 자민당 최대 파벌이던 다나카 파벌은 하루하침에 군소 파벌로 전락해 결국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파벌에서 후에 [[오부치 게이조]]가 나왔고, [[오자와 이치로]]도 후에 독립했으나 그의 파벌 출신이다. 이후 [[1987년]] [[일본 내각총리대신|총리]]에 취임[* 취임 당시에는 [[아키히토]] 황태자가 [[쇼와 덴노]]의 [[대리청정]]을 하고 있어서 임명장에 덴노의 서명을 대리하고 옆에 황태자의 서명도 병기했으며 취임식에서 임명장 수여도 황태자가 대신했다.]하고, 미국 방문과 [[1988 서울 올림픽]] 등 [[80년대]] 후반 [[대한민국]]과의 외교관계 개선에 역점을 둔다. 실제로 [[노태우]] 정권기 때, [[쇼와]] 장례식에 특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공조에 일본이 소외되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 시절이라 불가피하기도 했다. 또 1989년 3월에는 국회발언을 통해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에 대한 과거 식민지 지배를 반성하고 사과한다"는 뜻을 밝혀, 남북한과의 수교협상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다만 한국에서는 해당 발언이 있기 1개월 전 국회에서 [[https://weekly.donga.com/List/3/all/11/65384/1|"침략전쟁에 대한 학설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으며, 총괄하여 침략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후세의 사가가 평가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라는 발언이 재조명되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최초로 [[부가가치세]]를 제정하기도 했는데, 당시 중의원내에 야당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철시켰다. 이는 훗날 다케시타파의 자민당 의원들의 [[리크루트 사건]]과 함께 엮여 공공연히 왕따를 당하는 고초를 겪게 되었고, 사실상 다케시타파 의원들은 정계에서 강제로 [[퇴갤]]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후임 총리인 [[우노 소스케]] 역시 소비세 법안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실각당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ic.baike.soso.com/20090108120000-102314.jpg|width=100%]]}}}|| || 말년에 한 강연회에서. || 부가가치세는 과열 양상을 띠던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버블 경제]]를 잡고자 하는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구매력 저하 요인이 되어 이후 소비 위축과 [[디플레이션]] 요인이 된다.''' 그래서 호경기였을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낮았고, 리크루트 사건이 터지면서 지지율이 한자릿수대로 떨어졌을정도로 추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TPP]]격인 미일 [[FTA]]를 통과시키기도 했다. [[1989년]] 1월 7일 [[히로히토]]가 죽고 [[아키히토]]가 천황에 즉위하여 연호를 '[[헤이세이 시대|헤이세이]]'라고 하였다. 다케시타는 아키히토의 즉위 3개월 전 부터 쇼와 덴노가 각혈하자 좋아하던 [[골프]]를 끊고 근신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6월 중순에 리크루트 사건으로 사임하였다. 85년 다케시타파를 만들면서 [[다나카 가쿠에이]] 를 필두로 한 보수 자민당의 개혁을 주장했던 그의 정치 인생을 생각해 볼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가 [[플라자 합의]]에서 대장성 대신으로 엔고를 결정짓자 생긴 버블이 그의 부가가치세 정책 등으로 버블이 터져서 [[잃어버린 10년]]을 낳은 것도 역시 아이러니. [[http://cyber.chongju.ac.kr/~grjg7/korean/html/world/world-022.htm|#]] 흥미롭게도 그는 미국의 엔화절상 요구를 '''미국이 드디어 항복을 했다.'''라고 이해했다고 한다. 물론 뒤에 그의 실수를 인정했다. 총리 사임후 91년부터 자민당에서 고문직을 맡아 정치원으로 일했으며 99년부터 건강문제로 자주 용퇴의사를 밝히다 [[2000년]] 결국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그해 변형성 척추증에 동반된 호흡부전으로 [[도쿄도]] [[미나토구(도쿄)|미나토구]]에 있는 키타사토연구소병원에서 76세를 일기로 사망하게 된다. 지역구 [[시마네현 제2구]]는 본인의 비서를 맡고 있던 동생 [[다케시타 와타루]]에게 세습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